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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묵상] 민수기 36장 1절-13절,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세워진 집

생명의 삶/04 생명의 삶 민수기

by silentday 2025. 6. 1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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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6:1-13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기업 분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상속법을 벗어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게 됩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의 자리, 우리의 진정한 집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생명의 삶 묵상] 민수기 36장 1절-13절,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세워진 집
[생명의 삶 묵상] 민수기 36장 1절-13절,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세워진 집

 

 

민수기 36장 1절-13절,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세워진 집

 

 

1. 실존적인 문제: 기업 상실의 불안과 소외된 자아

 

오늘 우리는 4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의 방랑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민수기 36장, 민수기서의 마지막 장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그들의 마지막 법적, 행정적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 자손의 지도자들이 모세 앞에 나아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받았는데, 만일 그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와 혼인하면 그들의 땅, 즉 그들의 ‘기업(נַחֲלָה, 나할라)’이 본래 속했던 지파로부터 영원히 떠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입니다.

표면적으로 이 사건은 고대의 토지 상속법에 관한 복잡하고 건조한 논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낡은 문자 뒤에 숨겨진, 우리 시대의 영혼을 뒤흔드는 가장 근원적인 실존적 질문을 듣고자 합니다. 그것은 “나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존재가 뿌리내릴 진정한 기업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실존적 불안에 대한 심오한 물음입니다. 이 고대의 규례는 흔들리는 터전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내면적 독백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을 둘러싼 논쟁은 단지 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문제였고, 소속의 문제였으며, 미래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첨예한 현실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업’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깊은 공포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에게 그 기업은 평생을 바친 직장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사회적 명예와 안정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깨어질 듯 위태로운 가족 관계나 하루하루 쇠약해지는 자신의 건강일지도 모릅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폴 틸리히가 말한 ‘비존재의 위협(the threat of non-being)’에 직면합니다. 즉, ‘의미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불안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내가 추구하는 가치, 내가 살아온 삶의 모든 서사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공포가 우리 영혼의 심연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갈망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를 거대한 군중 속의 외로운 섬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소외감을 느끼며, 이 낯선 세상에 던져진 이방인처럼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이토록 차가운 세상 속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쳐 본 경험이 없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의 실존적 본질, 곧 ‘존재의 자기 소외(existential self-alienation)’입니다.

이러한 위협 앞에서 우리는 때로 열왕기상의 나봇처럼 저항합니다. 아합 왕이 세속적 합리성과 권력으로 그의 포도원을 빼앗으려 할 때, 나봇은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라고 외치며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기업을 지키려 했습니다. 우리 안에도 나의 정체성, 나의 가치관이라는 마지막 포도원만큼은 빼앗길 수 없다는 처절한 외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아합’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교활하여, 결국 우리는 나봇처럼 돌에 맞거나, 혹은 스스로 자신의 기업을 헐값에 팔아넘기며 존재의 파편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2. 소유가 아닌 소속으로서의 기업

 

이처럼 깊은 실존적 질문과 위협 앞에서,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답변합니까? 민수기 36장은 놀라운 해법을 제시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슬로브핫의 딸들의 자유로운 선택권("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을 인정하면서도, 그 선택이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만"이라는 더 큰 공동체적 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유산 보존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 둘을 변증법적으로 끌어안는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기업’과 ‘땅’은 단순히 소유할 수 있는 물질적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궁극적 실재, 곧 ‘존재의 근거’를 가리키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신 것은 부동산 계약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흩어지지 않고 영원한 소속감을 가질 것이라는 신적인 보증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업은 세상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그 어떤 위협도 흔들 수 없는 ‘소속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룻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심오한 통찰을 줍니다.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고 이방 땅에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모든 기업을 상실한, 가장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룻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아스의 책임감 있는 결단, 즉 ‘기업 무를 자(고엘)’의 역할을 통해 사라질 뻔했던 가문의 기업은 회복됩니다. 보아스는 율법을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한 가문을 구원하고, 룻에게 새로운 소속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참된 기업은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보아스’이며, 우리의 죄와 소외로 인해 상실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기업을 되찾아 주시는 ‘새로운 존재’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지파 저 지파를 떠도는 유랑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으로 입양된 상속자가 됩니다.

 

[생명의 삶 묵상] 민수기 36장 1절-13절,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세워진 집
민수기 36장 1절-13절, 슬로브핫의 딸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상황이 있기에, 자신들에게 땅을 분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3. 받아들여졌기에 가능한 자유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복음을 선포합니다. 당신의 진정한 자리는 당신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참된 기업은 불안 속에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약속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당신이 가장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당신의 삶이 실패한 것처럼 보일 때, 깊은 소외감에 절망할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존재보다 더 큰 실재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이 근본적인 수용의 경험이 바로 우리가 흔들리는 터전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는 유일한 반석입니다. 받아들여졌기에,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받아들여졌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되어 멸망이 확실시된 절망의 순간,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친척의 밭을 사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는 곧 적의 소유가 될 땅을 사는 어리석은 행위처럼 보였지만, 실은 멸망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회복과 새로운 기업을 믿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선포였습니다. 우리 삶의 성이 포위되고 절망이 엄습할 때, 믿음은 바로 이 ‘밭을 사는 행위’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나의 기업이 그분 안에서 영원히 보존될 것을 믿는 ‘존재의 용기’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의 더 큰 약속 안에 두었을 때,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위한 길을 찾았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자유와 삶을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께 맡길 때, 비로소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평안과 영원한 기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집은 더 이상 흔들리는 모래 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진리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용기로 세상을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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