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난 앞에서 믿음이 흔들립니까? "내 경건이 헛되다"는 시편 73편의 시인인 아삽의 절규가 당신의 마음을 대변하나요? 욥과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침묵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본문에 관한 설교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참된 복과 기쁨으로 발견하는 길을 찾아 나가고자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여정에는 노골적인 박해나 유혹보다 더 위험하고 미끄러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불의를 목도하며 나의 경건한 삶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는, '영혼의 현기증이 일어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 아삽은 바로 그 길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2절)라고 고백합니다.
아삽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악인의 형통함"(3절)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돈 문제로만 여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이 누리는 평안과 건강, 그들의 삶에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직 "고난"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삽의 이 정직하고도 고통스러운 외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가장 큰 기쁨으로 발견할 수 있는지를 찾게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크게 기뻐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아삽은 현미경을 들이대듯 악인의 삶을 관찰합니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견고해 보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4절),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5절),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도다"(12절)와 같은 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이 형통함 때문에 악인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됩니까?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그들의 목걸이가 되고 폭력은 그들의 옷이 됩니다(6절).
그리고 이 교만은 끔찍한 신학적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1절)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실지는 모르나, 이 땅의 구체적인 일, 특히 나의 불의와 성공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개입할 능력이 없다는, 훨씬 더 교활한 불신앙입니다. 그들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무능 혹은 무관심의 증거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삽의 발을 미끄러지게 한 유혹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라는 진리의 말씀과, 내 눈앞에 펼쳐진 부조리한 현실 사이의 거대한 간극 앞에서 아삽의 영혼은 멀미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 논리가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현실적이고 강력하게 보일 때, 우리의 믿음은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형통함을 충분히 관찰한 아삽은 이제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신앙의 기반을 뒤흔드는 무서운 절규가 터져 나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3-14절)
'실로 헛되도다!' 순결을 지키고 정직하게 살려했던 모든 영적 몸부림이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한 삶의 결과가 고난이라면, 이 경건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이 과연 복입니까? 아니면 차라리 저주입니까?
성도 여러분, 아삽의 이 절규는 그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까닭 없는 고난의 잿더미 위에서 자기의 의로움이 무슨 소용이냐고 부르짖었던 욥의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자기 민족의 죄악과 그들을 심판할 더 큰 악의 번성 앞에서 "어찌하여"라고 외쳤던 하박국의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주를 위해 비방을 받으면서도 악인들은 왜 평안하냐고 탄식했던 예레미야의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겪는 이 고통스러운 질문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미끄러운 길 위에서의 정직한 씨름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진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관문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14절,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끝이 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래도 성소에 들어가니 깨달았다"는 17절의 결론으로 건너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절망의 깊이를 충분히 마주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든 선한 노력이 헛되게 느껴지는 그 좌절감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악인의 형통 앞에서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질투와 분노를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이 미끄러운 절망의 경사면이야말로, 우리의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악인들처럼 고난 없는 삶과 물질적 풍요에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아삽의 위대함은 이 절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이 풀리지 않는 문제를 들고 결국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갑니다. 아삽은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해답을 찾습니다.
그 해답은 '악인들은 결국 망한다'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해답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는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고난이 없고 재물이 많은 것이 복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당신과 가까이 있는 것,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영원한 기업이요 만족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짜 복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발이 미끄러지고 있습니까? 세상의 형통함이 당신의 경건을 조롱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아삽처럼 그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다시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형통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흔들리지 않는 기쁨과 영원한 만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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