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기도가 막히고, 심지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조차 불안의 이유가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묵상 본문인 시편 77편은 우리의 의심과 탄식이 불신앙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욥과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과 정직하게 씨름하며, 요동치는 감정을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과 십자가의 소망을 발견하십시오. 이 설교는 당신의 가장 깊은 절망을 가장 진실한 예배로 바꾸는 길을 제시합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 있으십니까? 하늘은 놋쇠처럼 단단하고, 내 기도는 그저 허공을 맴돌다 힘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깊은 절망의 순간에 관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인 것 같은 영혼의 칠흑 같은 밤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시편 77편은 바로 그 영적 전투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정직하고도 고통스러운 영혼의 외침입니다.
이 시편을 읽다 보면 우리는 적잖게 당황하게 됩니다. 1절에서 시인은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며 믿음의 선포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곧장 이해할 수 없는 역설로 치닫습니다. 2절 하반절과 3절입니다.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시인은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찾으면서 동시에 그분의 위로를 거절하는 영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불안과 근심의 이유가 되어버리는 이 끔찍한 모순. 이것은 단순히 시인 한 사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마저 의심하게 되는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처절한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밤에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근간을 뒤흔드는 영적 씨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진리는, 시인의 정직한 탄식이 불신앙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차원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경건한 말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어지고 상한 마음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4절을 보십시오.
시편 77: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시인은 자신의 불면과 고통의 근원마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원망을 넘어선 처절한 신뢰입니다. 내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조차 하나님의 손길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을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에서 고난의 대명사인 욥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욥은 친구들의 쉬운 신학적 정죄, 즉 ‘네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는 공식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가지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직접 항변했습니다. 왜 나를 과녁으로 삼으시냐고, 왜 나를 대적처럼 여기시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항변은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로 향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씨름의 끝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렇습니다. 정직한 탄식과 씨름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마침내 눈으로 뵙는 더 깊은 임재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고통을 숨기지 마십시오. 당신의 의심을 죄책감 속에 가두지 마십시오.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위선적인 찬양보다 정직한 눈물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정직한 탄식은 필연적으로 기억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5절과 6절에서 과거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의 날들, 밤에 기쁨으로 불렀던 찬송의 노래들을 기억해냅니다. 과거의 하나님은 분명 선하셨고, 신실하셨으며, 구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영광스러운 기억이 현재의 고통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 팝니다. 과거의 하나님과 현재 침묵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엄청난 간극 때문에, 그의 영혼은 믿음의 근간을 뒤흔드는 여섯 가지 끔찍한 질문을 쏟아냅니다.
시편 77:7-9,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이 질문들은 하나님의 성품 자체, 즉 그분의 은혜, 언약적 사랑(חסד), 약속, 긍휼을 향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이와 같은 영적 고뇌를 겪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했지만, 돌아온 것은 핍박과 조롱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처절하게 씨름하며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예레미야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속이셨다고까지 느끼는 이 극한의 고통. 시편 77편의 시인과 예레미야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극심한 고난은 우리의 감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어왔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뢰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밤에 우리가 겪는 신학적인 지진입니다.
감정이 우리를 속이고, 과거의 기억마저 희미해질 때, 우리는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합니까? 시편 77편은 우리에게 그 답을 암시합니다. 본문 곳곳에 나오는 ‘셀라’라는 표시는 잠시 멈추어 호흡하며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멈추어, 이제 다른 선택을 해야 할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갈멜 산에서 850대 1의 싸움에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엄청난 영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 왕비의 살해 위협 한마디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도망쳐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간구합니다. 바로 직전의 위대한 승리가 현재의 절망을 막아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먹이시고 위로하시며, 호렙 산으로 이끄셔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그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열왕기상 19: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처방은 엘리야의 감정을 분석하거나 그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시선을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서 돌이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사명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감정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과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바라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77편의 시인 역시 이 ‘셀라’의 멈춤 이후, 하나님의 옛 행적, 곧 그분의 창조와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회복의 길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편 77편을 통해 고통의 밤을 지나는 영혼의 여정을 함께 걸었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탄식이 믿음의 언어임을 보았고, 고통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과 신뢰를 뒤흔드는지 보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넘어 하나님을 선택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반응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당신의 고통을 가지고 달려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77편의 시인이 던졌던 여섯 가지 끔찍한 질문들, 그 질문들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십자가 위에 있습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버림받으신 아들을 통해 "아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이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통해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확증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은 탄식을 외치셨기에, 이제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당신의 가장 아픈 질문을 가지고 세상의 위로, 즉 술이나 쇼핑이나 헛된 쾌락으로 도망치지 마십시오. 대신, 그 질문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달려가십시오. 당신의 가장 정직한 탄식이 위선적인 경건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가장 깊고 진실한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바로 그 씨름의 자리에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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