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진리의 이해와 참된 제자도의 길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말씀 묵상입니다. 요한복음 6장 60-71절을 통해 현대 교회가 직면한 도전들을 살펴보고,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믿음의 자세를 함께 고민합니다. 피상적 신앙을 넘어 영적 차원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도록 이끄는 설교 말씀을 나눕니다.
어느 날 한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손님이 웨이터를 불러 메뉴를 주문하려는데, 웨이터가 "오늘의 특선 요리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손님은 웃으며 "그래도 한번 설명해보세요"라고 했죠. 웨이터는 "프랑스식 분자요리로, 겉보기엔 스테이크 같지만 사실은 생선이고, 소스는 액체 질소로 순간 냉각해서 분말 형태로 만든 것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손님들은 하나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반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렵다고 느끼고 떠나간 제자들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요리를 믿고 주문한 손님들은 놀라운 맛의 세계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깊은 고뇌를 봅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는 그들의 탄식에는 영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육신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더 깊은 문제는 믿음의 결핍입니다.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겉으로는 제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는 이들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가는 장면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은 신앙의 위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기대나 이해와 맞지 않자, 그들은 쉽게 등을 돌렸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믿음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예시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본문과 유사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신앙의 피상화 현상이 심각합니다. 많은 현대 크리스천들이 편한 설교만 찾아다니며, 도전적인 말씀이나 헌신을 요구하는 가르침을 외면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어려운 가르침 앞에서 떠나간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둘째, 실용주의적 신앙관이 만연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한에서만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는 열광했지만, 영적인 떡에 대해 말씀하시자 떠나간 군중처럼 말입니다.
셋째, 신앙과 삶의 분리 현상이 심각합니다. 주일에는 열심히 예배드리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넷째, SNS와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인한 집중력 저하는 깊이 있는 말씀 묵상을 방해합니다. 짧은 영상과 즉각적인 만족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제자들을 강제로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심으로써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강요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자발적인 믿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영적 깨달음의 결과입니다. 육신적 이해를 넘어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신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가 아닐까요?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까지도 끝까지 제자로 두신 것은 끝없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언행은 참으로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의 수군거림을 아시고도 직접적으로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대화를 이어가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영적 진리의 본질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닌,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부터 이미 유다의 배반을 아셨지만, 그를 차별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는 슬픔과 동시에 제자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강요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인 헌신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신뢰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는" 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하고 계십니다. 피상적인 신앙에서 깊이 있는 신앙으로, 실용주의적 신앙에서 헌신적인 신앙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자세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실천적 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거나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영적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SNS와 디지털 문화의 빠른 템포에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를 맞추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로는 주님의 말씀이 어렵게 느껴져도,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편한 길을 찾아 떠나가는 자가 아닌,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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