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한복음 7장 1-13절을 해설하며 예수님이 세상의 기대와 달리 겸손과 섬김, 십자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님을 세상적인 메시아로 오해했듯,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적인 성공과 기적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르기를 기대하지만, 참된 교회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요한은 이제 초막절을 배경으로 예수님이 장차 의인들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분임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임하셔서 행하시는 구원과 심판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기대와 달리 겸손과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시며,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참된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과 상반되기에, 세상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용하려 하거나,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제거하려 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르기를 기대하며, 그렇지 않으면 비판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에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굳게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도 초막절이 되면 '통곡의 벽' 앞에 모여 기도하고 집회를 갖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초막절이 큰 명절이므로 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에 머무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유대로 가서 자신을 '나타내라'(ἐν παρρησίᾳ 엔파레시아, '재림'을 의미하기도 함)고 종용합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큰 이적을 일으켜 제자와 추종자를 더 많이 얻어야지, 왜 갈릴리에 '숨어'(ἐν κρυπτῷ 엔크립토, '비밀히')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메시아가 되려면 세상의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의 비밀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적인 성공과 기적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 이유는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형제들의 제안처럼 세상의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의 방식이 악하다고 증언하시기에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들을 먼저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후 자신도 '은밀히'(ἐν κρυπτῷ 엔크립토)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은밀히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심판주, 구원자로서 예루살렘에 임하시겠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순례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온 세상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권력이나 힘이 아닌,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민족을 위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상 유대 공동체를 다스리며 개인의 유익을 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초막절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기회로 삼아 예루살렘에서 정치 세력화를 꾀하리라 예상하고, 그전에 예수님을 체포해 자기들의 권세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유대 지도자들에 대항해 예수님이 세력을 규합할 것을 기대하면서도 권세 잡은 자들이 두려워 수군거리고만 있습니다(12절: 시 41:7). 이는 무리가 특별한 정치적,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쉽게 선동당하고 권세자들을 두려워하는 군중에 불과함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논리로 신앙을 해석하고 재단하는 일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칼이 아니라 말씀으로, 전쟁이 아니라 십자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칼로 세워진 크고 강한 나라들은 결국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흥왕하며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밀하지만 강력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당당히 세상에 맞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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