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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묵상] 요한복음 9장 35절-41절, 내가 믿나이다

생명의 삶/43 생명의 삶 요한복음

by silentday 2025. 3. 8. 17:29

본문

요한복음 9장 35절-41절을 묵상하고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인 눈을 뜨는 ‘회복의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컴맹처럼 영적 맹인 ‘영맹’은 스스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본문 속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본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믿음을 고백한 맹인을 통해 참된 ‘보는 사람’을, 교만한 바리새인을 통해 ‘못 보는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진정한 복은 세상적 성공이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스스로 영적 맹인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께 나아갈 때,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삶 묵상] 요한복음 9장 35절-41절, 내가 믿나이다
[생명의 삶 묵상] 요한복음 9장 35절-41절, 내가 믿나이다

 

 

요한복음 9장 35절-41절, 내가 믿나이다

 

 

서론

 

현대 사회에서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 부릅니다. 마치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여 자신이 컴맹인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영적인 영역에도 ‘영맹’이 존재합니다. 컴맹은 컴퓨터가 고장 나기 전까지 자신의 무능함을 자각하지 못하듯, 영맹은 영적인 문제에 직면하기 전까지 깨닫기 어렵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 과거 사회에서 큰 불편함이었고, 문맹 퇴치 운동이 중요한 과제였던 것처럼, 영적인 문맹, 즉 영맹은 우리 영혼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스스로는 잘 본다고 착각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맹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안에 혹시 숨겨진 영맹은 없는지 돌아보고, 주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신을 컴맹이 아니라 착각하듯, 영적으로 눈을 감은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오늘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본론

 

첫째, 정말 보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맹인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여기서 ‘들으셨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맹인의 고백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함을 인정하셨다는 깊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맹인은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고난을 겪었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를 만나 위로하셨습니다. 이는 고난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고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처럼, 주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건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이는 세상적인 위로 대신, 맹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복이 예수님 자신임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맹인은 인자가 누구인지 물으며 믿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인자임을 밝히십니다. 물질적인 풍요나 세상적인 성공이 복의 핵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복이며 위로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인자’는 고난받는 메시아이자, 온 세상을 통치하고 심판하실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고난의 길을 걷더라도 그것이 값진 길이며, 자신이 심판주로서 참과 거짓을 가려낼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맹인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그의 믿음은 점진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 ‘선지자’,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인식했지만, 이제는 ‘인자’, 즉 메시아, 구원자, 심판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때로는 갑작스럽게, 때로는 점진적으로 성장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원자와 심판주로 진실되게 믿는 것입니다.

 

둘째, 정말 못 보는 사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심판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며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게 되지만,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오히려 영적인 맹인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구원과 처벌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합니다. 맹인처럼 겸손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주어지지만,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며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영적인 맹인이라는 처벌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3장 17-18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의 시작이며,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삶은 이미 죽은 영혼과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로서 스스로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교만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고 다 안다고 여기는 교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맹인이 되었더라면’은 맹인처럼 자신의 영적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히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스스로 다 안다고 여기며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지식과 지위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맹인은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스스로 본다고 착각하며 영적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며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결론

 

맹인이었던 그는 치유 직후 바로 완벽한 제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는 ‘한 가지 아는 것’으로 종교 권력자들에 맞섰습니다.  자신의 변화된 경험과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지식과 지위가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다 안다’는 교만은 마음의 문을 닫고 영적 맹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삶으로 진리를 살아내지 못했고, 익숙한 방식대로 예수님을 거부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 사랑과 구원으로 영생을 누리는 우리는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지와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 성령님은 지혜와 지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말씀대로 살아, 하늘나라의 기쁨과 생명을 누리고 나누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하는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우리를 살리려 목숨까지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저희의 영적 맹인됨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오니,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지혜와 명철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주신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  말씀 따라 살아가는 제자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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