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족보가 담긴 마태복음 1장 1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하나님의 약속과 구약의 예언의 연속성 속에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1장 1절의 시작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헬라어 원어와 그에 대한 설명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ε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의미.
아브람은 북부 셈어형의 이름이며, '아버지는 높임 받으신다'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를 의미한다. 전자는 창 11:26-17:4에 나타나며, 후자는 대상 1:27; 느 9:7을 제외한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대상 1:27과 느 9:7에는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함께 나타난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창 17:5에서 계약의 갱신과 함께 하나님에 의해 "열국의(많은 무리의) 아버지"로 설명되는 아브라함으로 개명되었다.
아브람의 생애.
① 아브라함은 셈의 후손이며(창 11:10, 26; 11:10-26; 대상 1:24-27), 우상 숭배하던 데라의 아들로(창 11:26, 27; 수 24:2). 우르에서 태어났다(창 11:28, 31).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형제 나홀, 하란과 함께 살았으며, 사래와 결혼했다(창 11:29). 하란이 죽자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과 함께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했다(창 11:31). 이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는 죽었다(창 11:32).
② 아브라함은 75세 때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다(창 12:4-6).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받고 그 곳에서 단을 쌓는다(창 12:7). 그 다음 이동하면서 벧에서 단을 쌓고(창 12:8) 차츰 남쪽으로 옮겨 갔다(창 12:9).
③ 아브라함은 심한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다(창 21:10), 그 곳에서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고(창 12:11-13), 바로는 사래를 궁으로 데려갔으며(창 12:14, 15), 아브라함은 사래로 인해 후대를 받았다(창 12:16). 그래서 아내 사래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 했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피할 수 있었다. 바로가 이 일 때문에 재앙을 받고 사래를 돌려 보낸 것이다(창 12:17-20).
④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어 벧엘로 돌아왔고(창 13:1-4), 그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창 13:5-7), 롯에게 비옥한 요단의 들을 양보하였다(창 13:8-12). 아브라함은 롯이 떠난 후, 두번째로 약속의 확증을 받는다(창 13:14-17). 그는 장막을 옮겨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하며, 단을 쌓았다(창 13:18; 참조: 창 35:27).
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쳐부수고 소돔에서 포로가 된 롯을 구하고, 빼앗겼던 인민과 부녀와 재물을 다 찾아왔다(창 14:12, 14-16). 소돔왕의 영접을 받고(창 14:17),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고 십일조를 바쳤다(창 14:18-20; 참조: 히 7:1). 그리고 그는 소돔왕의 청을 사양한다(창 14:21-24). 여기서 소돔왕은 소돔이 지금 아브라함에게 신세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었지만 아브라함은 장차 아브라함이 거부가 되었을 때 그들이 말하기를 '이번 전쟁을 계기로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었다'고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만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므로 소돔으로부터 실오라기 하나 받지 않은 것이다.
⑥ 아브라함은 그 후에 세번째로 약속을 보증받는다(창 15:1-5).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로다함을 받았다(창 15:6).
⑦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약속이 더디자 하갈을 첩으로 취한다(창 16:1-3). 그는 신앙적인 방법에서 그 당시의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한다. 그것은 당시에 아들이 없는 부부가 첩을 얻어서 그녀를 통하여 자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사래의 여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취하여 그녀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다(창 16:4, 15, 16).
⑧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번째로 약속의 보증을 받는다. 여기서 하나님은 세가지 방법으로 그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확신시키셨다. 첫째로 아브람과 사래에게 새로운 이름을 줌으로써 새로운 백성으로서의 의식을 공고히 하셨으며(창 17:3-5), 그 다음에, 지금까지의 언약을 재차 자세히 설명하심으로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도록 배려하셨다(창 17:6-8).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로 알리시는데 있어서 그 당시 인간이 알 수 있을 만큼 보이시고, 그의 신앙 성장에 따라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부분도 크게 넓어지게 하신다. 하나님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와 있었던 것이다(창 17:6-8).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언약을 받고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받는다.
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을 것(창 17:15-18)과, 그 아들 이삭과 언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다섯 번째로 받는 약속이다(창 17:19, 21, 22).
⑩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하고 그 사자로부터 아들에 대한 약속을 다시 받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는 여섯 번째 약속이다(창 18:10, 13-15, 17-19). 그 사자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통보를 받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창 18:20 이하). 아브라함으로 인해 롯이 구원을 받았다(창 19:29).
⑪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그랄로 가서 살았으며(창 20:1),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창 20:2 이하). 그래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사라를 돌려받았다(창 20:14).
⑫ 아브라함은 100세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낳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했다(창 21:1-4; 21:1-8).
⑬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었다(창 21:9, 10, 14). 이후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브엘세바를 자기의 거주지로 확보한다(창 21:1-34).
⑭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하는 유일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모리아 땅에 가서 제단을 쌓아 아들을 올려 놓고 칼로 찌르려는 순간에 수양을 발견, 대신 번제로 드렸다(창 22:1-10). 이 결과로 후손에 대한 복을 일곱 번째로 약속 받는다(창 22:16-18). 거기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로 와서 거하였다(창 22:19). 아브라함은 그 후에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에 막벨라 굴이 있는 밭을 사서 사라를 위해 매장지로 삼았다(창 23:1-20).
⑮ 아브라함은 이삭이 40세가 되자 자기 종 엘리에셀을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나홀 성으로 보내어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선택, 데리고 와서 결혼시켰다(창 24:65-67).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후처로 삼고 자녀를 얻었다(창 25:1-4). 그는 장수하다가 175세에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아브라함의 특징.
주의 벗(대하 20:7; 사 41:8), 믿음의 사람(창 15:6), 기도의 사람(창 12:8; 창 13:4; 창 20:7, 17), 선지자(창 20:7), 순종의 사람(창 22:1-3; 22:1-18), 비이기적임(창 13:8, 9; 창 21:25-27), 용감함(창 14:13-16). 독립심이 강함(창 14:21-23; 창 23:11-13, 16), 경건함(창 18:19; 창 22:12; 22:3-13; 창 26:5; 느 9:7, 8), 부유함(창 13:2; 창 24:35), 하나님의 방백(창 23:56).
초기 유대교
초기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강조되고(마카베오일서 2:52; Philo Abr. 268-276; Her. 90-95) 그의 성실함이 하가다의 형식으로 정성들여 기록되었다. 집회서 44:19-21에서 그것은 보다 더 정밀하게 율법에 대한 성실함으로 묘사된다. 희년서(Jubilees)에서 아브라함은 단호한 우상 숭배 반대자이고 히브리의 언어와 전통을 재건한 자이다(Jub. 11-12; 20-22). 그는 유혹을 견디어 내고(19:8) 기도와 손을 얹음으로 바로의 문둥병을 고쳤다(1Qap Gen 20:16-29). 그는 시련에서 구조되었다(Gen. Rab. 44:13; Bib. Ant. 6:15-18).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축복의 결과는 광범위하다: 홍해에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믿음, 또는 이삭을 희생제물로 기꺼이 바침에서 기인한다(Mek. Exod. 14:15에). 아브라함의 혈통은 영원한 왕국에 있는 처소를 보장한다(Justin Dial. 140). 이삭의 결박을 기초로하여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위한 중재자로 나타난다(y. Ta'an. 2:65d).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고백하는 모든 자들은 비록 그들의 죄가 많을지라도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참예한다고 한다(SB1 마 3:9에 대해). 다른 한편 공동체 규정(1QS 2:9)은 저주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조상들" fathers의 공적의 효력에 반대하여 논쟁한다.
아브라함의 묵시록
헬라파 유대인의 '아브라함의 묵시록'(Apoc. Abr)(A.D. 1세기?)은 아브라함을 일신론자이며 미래에 대한 계시의 수령자로 묘사한다; 같은 시대의 '아브라함의 언약'(T. Abr.)은 그의 죽음의 공표와 그의 하늘 나라로 올라감에 대해 묘사한다.
아브라함은 신약성경에서 73회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의 어떤 필연적 효력에 대하여는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사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선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자신의 백성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마 1:2), 그로부터 다윗까지 14대를 나아간다(마 1:17).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도 하다(마 1:1; 참조: 마 1:21). 누가는 아브라함을 단지 예수님의 계보의 한 일원으로 언급하고 그 계보는 아담에게까지 이른다(눅 3:34).
성도는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
마 3:9(병행구 눅 3:8),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알려지는 것을 특별한 영예의 칭호로 여겼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공적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기 백성의 조상으로 불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이 메시야의 나라의 모든 축복을 그들에게 보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세례(침례) 요한은 이러한 사상이나 신념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되는 가능성을 설명하였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오직 심령을 하나님의 임할 나라에 두는 자라야 회개의 참 열매(회심)를 맺고 최후의 심판을 예기하는 세례(침례)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한 자리를 소망할 권리를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이유이다. 예수님은 이 사회에서 백안시받던 삭개오의 집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구원을 이르게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살아 있는 아브라함
막 12:26(병행구, 마 22:32; 눅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현시하신 것에서 율법이 죽은 자의 부활을 지적하는 것을 보셨다. 만약 살아계신 하나님께서(참조, 출 3:14) 그를 언급하신다면 그는 살아있음에 틀림없다. 족장들처럼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예수님께서도 받아들이시고 하나님 계신 곳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는 죽을 수는 있으나 삶이 끝날 수는 없다.
나사로를 품에 안은 아브라함
눅 16:22에서 아브라함은 살아있어서 나사로를 위한 지복의 장소의 구성 요소가 된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말은 겉옷을 가볍게 끌어올림으로 생기는 허리 띠 위의 공간(헤크)을 의미한다. 이런 식의 묘사는 랍비 문헌들에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아마도 어머니가 가슴 위의 옷 주름 안에 아이를 품는 사랑의 돌봄과 같은 특별한 돌봄이나 또는 영예의 자리인 아브라함 옆자리의 식탁에 대한 언급인 것 같다. 사람이 식탁에 기대어 누울 때, 그의 머리는 대개 옆 사람의 가슴 면에 닿게 된다(요 13:23, SB Ⅱ). 그는 역시 부자의 영혼에 의해 불리워질 수 있고 그에게도 역시 여전히 "아버지 아브라함"이다(눅 16:23 이하; 눅 16:27; 눅 16:30). 그러나 부자에게 축복은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소유물로 인해 고갈되었다(눅 16:25). 축복의 영속하는 효력은 율법과 예언에 대한 순종에 의해 보장되는데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주 당연하게 대변자로서 나타난다(눅 16:29; 눅 16:31).
이방인 구원의 표상인 아브라함
마 8:11(병행구, 눅 13:28),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의 복은 전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다. 예수님께서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라고 위협하시는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은 첫번째 개종자이며 또한 가장 위대한 개종자였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육적이며 민족적인 상속자들로만 에워싸일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유형과 같은 사람들 즉 개종자들도 있을 것이다. 천국 연회가 열릴 때 그의 식탁 친교에서 이삭과 야곱과 아브라함과 더불어 이방인들도 역시 참여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혈통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의 혈통은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의무를 나타낸다. "아브라함의 딸"은 마귀의 노예가 될 수 없으며(눅 13:16; 요 8:33-40) 세리라 할지라도 여전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구원의 후보자이다(눅 19:9).
대표적인 족장
사도행전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세 명의 족장 중 가장 중요한 대표자이다(행 3:13; 행 7:32).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가족이며(행 13:26),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과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성취된다(행 3:25). 스데반의 설교(행 7:2-행 7:8; 행 7:16 이하)는 아브라함에게 한 이스라엘이 노예가 될 것이라는 예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역사의 중대한 시점까지 상기시켰는데(행 7:6 이하; 참조, 창 15:13 이하) 시작 부분에 아브라함의 할례가 있고(행 7:8) 결론 부분에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의 마음이 나온다(행 7:51).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난 아브라함 논쟁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두 가지 토의를 본다.
첫째 부분(요 8:30-40)은 육체적 자손들("아브라함의 씨", 요 8:33; 요 8:37; 참조: 요 8:39)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유대인들의 믿음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위들을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8:39 이하). 아브라함은 단지 하나님의 자유롭게 하시는 말씀(Word) 만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육신하여 그들 앞에 섰다는 것에 대해 침묵하고 싶어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사실상 예수님만이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잡는 것만이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이 행했던 대로 행함으로 그 가장의 진정한 자녀임을 입증한다.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로 해석된다(요 8:33; 요 8:39 이하).
두번째 부분(48-59절)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보다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셨을 때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발언으로 시작한다. 유대 사상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실 때는(요 8:51)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이 영생을 보장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선지자들과 같은 죽을 인간이라는 것이다(요 8:52). 그렇지만 예수님은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분이셨다. 유대 사상에도 메시야와 모세는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영생을 부여할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의(하나님의 말씀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보다 먼저 계셨고 그보다 높으신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본 증인으로 간주된다(요 8:56). 언약을 맺을 때에(창 15:12-21),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미래의 주요 운명을 보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견해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충분히 있다(SB Ⅱ, ad loc.). 이어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나이다 I am)"라고 말씀하신다(요 8:58).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고 또한 영원히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으로 영원하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살다가 죽었던 것이다(참조: H. Seebass).
아브라함의 씨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이점과 그 자신의 혈통 모두를 표현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롬 9:7). 고후 11:22; 롬 11:1에서 바울은 자기도 "아브라함의 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종말론적 아들의 자격을 가진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방정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스마엘과 대조되는 이삭의 예가 명백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후자는 오직 약속의 자녀(롬 9:7-롬 9:9), 즉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창조적인 약속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첫번 째로 중요하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자의 표상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창 15:6을 근거로 하여 믿는 자의 모델인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역시 믿음으로 인한 칭의로 말미암아, 오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유대의 전통과 대조적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을 율법으로부터 떼어놓고, 그가 받은 할례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취급하고, 약속과 믿음이 시간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앞선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가 할례를 행하기 전 그리고 율법 시대 이전(참조, 롬 4:13)에도 아브라함은 은혜로 주어지는 약속을 통한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롬 4:13-롬 4:15), 할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증과 그에게 "많은 민족의 아버지" 즉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의 명예를 주는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롬 4:10-롬 4:12; 롬 4:17).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의 자손이다(롬 4:16 이하).
따라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에서 "언약의 표시"(창 17:10 이하에서처럼)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할례 이전에 보여준 믿음에 기초한 "의롭다하심의 인치심"을 본다(롬 4:11 이하). 아브라함의 아버지 됨도 역시 재 정의된다: 유대인의 육신의 조상(롬 4:1)은 그의 믿음을 본받음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할례라는 의미의 "할례받은 자들의 아버지"이다. 땅을 상속하리라(롬 4:13)는 약속 역시 영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근본적인 특성과 종말론적 중요성을 지닌다. 모든 인간의 소망과 반대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에 대한 약속을 붙잡았고,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자의 창조적인 말씀을 영광되게 하였다(롬 4:17-롬 4:21).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여(롬 4:24 이하) 용서를 통하여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뜻을 가능하게 한다(롬 4:5).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축복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되는 축복(갈 3:6-갈 3:9)을 율법을 행하는데 실패한 자들 위에 있는 저주(갈 3:10-갈 3:13)와 대조시킨다. 민족들을 위한 아브라함의 복은 이방인을 의롭게 하시는 원시 복음으로 이해된다(갈 3:8 이하).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의 후사이다(갈 3:29). 아브라함의 복은 종말론적으로 나무에 달리신 자(갈 3:13 이하)에 의해 성취되는 구원으로 시행되며, 바울도 특별히 약속의 영원한 유효성(창 17:7)은 오직 영원히 통치하시는 메시야에 의해 보장되기(삼하 7:12-삼하 7:14; 참조, 롬 1:3 이하) 때문에 특히 그리스도에 대해(갈 3:16) "아브라함의 씨"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갈 4:22에서 아브라함은 각각 위에 있는 시나이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하갈과 사라의 남편으로 언급된다. 롬 8:32은 창 22:16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의 자기 아들 내어주심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것과 관련지어 진다(참조: O. Bocher).
①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은 히 11:1에 정의된 바와 같은 종말론적 경향의 믿음의 이상을 구현한다. 그는 그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으로 거주하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성을 기다렸으며(히 11:8-히 11:10),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히 11:17-히 11:19). 이미 맹세로 확증한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로 굳게 붙잡았다(히 6:13-히 6:15). ②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후사는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리워지는(히 2:16) 믿는 자들(히 6:17)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이 행한 것과 같이 믿음에 의해 사는 모든 사람, 즉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일 것이다. ③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분 일을 주는 미덕에 의해, 그렇게 함으로써 멜기세덱의 하나님과 그의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시 110:4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의 증인이 되었으며, 그 대제사장직은 그 종말론적 실현을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무에서 찾는다(히 7:1-히 7:10)(참조: O. Bocher).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자신보다 위대한 자로 인식하였다. 마찬가지로 레위족의 제사장직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으로 선포된 분이야말로 더 위대한 분임에 틀림없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약 2:20-약 2:24에는 바울의 사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반대하여,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그의 행위에 근거한다. 기자가 창 15:6(약 2:23)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의 제사에 의해 완성되고, 그래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의 결과이다는 것을 확인한다(약 2:22 이하).
사라의 주(主) 아브라함
베드로전서 3장의 가족의 규범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른 사실(창 18:12)은 모범적인 아내의 증거로 평가된다(벧전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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