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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절, 자손(υἱός, 휘오스, son) - 헬라어 원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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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시작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영으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음을 헬라어 원어 'υἱός'(휘오스)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인 υἱός(휘오스, 아들)에 대한 의미와 여러 해석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자손(υἱός, 휘오스, son) - 헬라어 원어 정리
마태복음 1장 1절, 자손(υἱός, 휘오스, son) - 헬라어 원어 정리

 

 

마태복음 1장 1절, 자손(υἱός, 휘오스, son) - 헬라어 원어 정리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헬라어 성경의 마태복음 1장 1절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ε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헬라어 원어 υἱός(휘오스, 자손)에 대한 정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υἱός(휘오스, 자손)(Homer 이래)는 인간의 아들과 동식물의 소생을 포함하는 아주 광범한 의미의 '아들'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휘오스는 직접적인 부모가 아니더라도 조상들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후손'(descendant)을 의미할 수도 있다(Homer,11., 2,727). 예컨대 '손자'의 뜻으로 사용된 경우 등이다.

가족 관계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해관계의 개념이 되기도 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집단의 회원 자격이 아들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Homer: the Achaians의 아들들)은 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υἱός(휘오스, 자손)는 속격과 더불어 어떤 사물이나 개념이 서로에 의존되어 있거나 서로에 소속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예: 빛의 아들들, 어둠의 아들들 등등).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υἱός(휘오스, 자손)는 70인 역본에서 약 4,8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벤(아들, 손자, 어떤 집단의 구성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휘오스는 70인 역본에서 사람의 아들이나 짐승의 새끼, 자손, 어떤 특정 집단의 구성원,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단 7:13 이하에서 사람의 아들(인자), 즉 메시아를 나타내며, 또한 선지자를 인자로 표현한다(겔 2:1; 겔 2:3; 겔 3:1 등).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υἱός(휘오스, 자손)는 신약성경에서 37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1. 하나님에 대한 언급없이 표현된 υἱός(휘오스, 자손).

(a) 휘오스는 아들과 부친의 관계(막 10:46), 모자 관계(마 20:20), 부모와 자식의 관계(눅1:13)를 말할 때 사용되었다.

(b) 휘오스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예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마1:21이하와 눅 1:31; 눅 2:7에서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의 아들로 언급되었다. 족보에서는(마 1:16; 눅 3:23) 혈통적 후손보다 법적인 것을 더욱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막 6:3의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언급은 아마도 요셉이 죽은 후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 생각된다. 병행구 마 13:55; 눅 4:22; 요 6:42에서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원의 참된 신비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계 12:5의 아들은 공동체(그리스도교회)의 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c) 마 2:15에서 예수님은 세계의 구원자로 예정된 한 아들이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는 호세아 11:1 인용절("내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에서 그 거룩한 주의 가족이 애굽에서 돌아온 것을 이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성취라는 차원에 있어서 이것을, 장차 올 것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분명히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어릴 때에 애굽으로부터 돌아온 것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의 성취인 것이다. 즉 지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 그것도 호세아가 언급하고 유대인들이 역사상의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본래의 출애굽 사건은 외견상 무의미하게 보였으나 사실상 인류를 위하여 가장 뜻깊고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 바로 그 사건의 예시적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Colin Bown).

(d) 휘오스는 예수님과 믿는 자들을 묘사한다. 마 7:9과 히 12:5 이하에는 믿는 자들을 아들처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있다. 마 17:25 - 마 17:26에서는 믿는 자들은 임금의 아들이다. 여기서 강조하려 한 것은 율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전과 희생 제사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믿는 자들은 이 문제에서 자유할 수 있으나 유대인 선교가 항상 가능할 수 있는 회당에서의 교제의 계속을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 5:9에서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예이며 가장 귀중한 은혜의 선물이다.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단어들은 그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에 의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 수 없다. 그에게 그 이름이 주어짐으로써만 아들이 되는 것이다(A.Schlatter; 참조; 신 14:1; 호 2:1). 마태복음 중의 중요한 여러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또는 암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는 사실에 의거해 볼 때 이 일곱 번째 복은 한층 더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세례 받을 때, 시험받을 때, 베드로의 신앙 고백, 변화산상의 사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제자의 파송 등이 이러한 부분들에 해당된다(마 2:15; 마 3:17; 마 4:3, 마 4:6 이하; 마 8:9, 마 8:29; 마 11:25 이하; 마 14:33; 마 16:16; 마 17:6; 마 21:37 이하; 마 26:63; 마 27:40, 마 27:43, 마 27:54; 마 28:19). 이러한 배경 하에서 볼 때 이 일곱 번째 복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이스라엘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이스라엘 중의 화평케 하는 자들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또한 인간이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예수님과 동일한 신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e) 예수님은 최고의 선이 되시는 아들이시다. 눅 7:12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당신의 연민을 나타내 보이셨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 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14:5는 안식일일지라도 치료를 행하여야 하는 급박성을 말하면서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진 경우를 상징하고 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f) 예수님은 신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분이시다.

  •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반목은 종말적인 환란의 표시이다: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3).
  • 참된 제자의 도리는 아들이나 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g) 전이된 의미로, 요 19:26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를 그의 모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h) 휘오스는 아브라함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가리킨다.

  • 눅 15:21 이하에는 용서가 탕자를 참된 아들로 만들어 주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 눅 19:9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이 구원의 핵심적인 요소임을 언급한다.
  •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갈 4:22 이하).
  • 막 27:9; 눅 1:16; 고후 3:7 이하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다.

(i) 휘오스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마 12:27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을 바리새인들의 "아들들"이라고 칭하신다. 행 23:6에서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한다. 벧전 5:13에서 마가는 베드로의 아들로 언급되었다.

(j) 휘오스는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나라의 아들들'(마 8:12; 개역, "나라의 본 자손들"), '평화의 아들'(눅 10:6; 개역 "평안을 받을 사람"), '빛의 아들들'(눅 16:8), '이 세대의 아들들'(눅 16:8), '부활의 아들들'(눅 20:36; 개역, "부활의 자녀"), '악한 자의 아들들'(마 13:38), "마귀의 아들"(행 13:10), "불순종의 아들들"(엡 2:2), "멸망의 아들"(요 17:12), '신랑의 방에 있는 아들들'(막 2:19; 개역, "혼인집 손님들"), "우뢰의 아들"(막 3:17) 등이다.

 

2. 하나님의 υἱός(휘오스, 자손)로서 예수님.

(a)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그 때문에 비난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했다(마 27:4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 칭호 이상의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너희의 아버지" 하나님을 구분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천명하셨다.

(b) 예수님은 다윗 왕권 계승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승귀의 통치. 롬 1:3-롬 1:4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공동체의 메시야적인 왕으로서의 영원한 왕권을 수여받은 다윗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기능을 나타낸다.
  •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부활. 행 13:33에 의하면 예수님은 아들로서 일으키심을 받으셨다. 이 구절의 핵심은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하나님의 독특한 개입 행위와 함께 아들의 왕적 통치의 시작이 된다.
  • 예수님의 세례(침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침례)에 대한 진술은 종말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킨다. 하나님의 기쁨은 종말적인 왕을 선택하신 사실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의 사역은 다윗 가문에게 약속하신 통치로 이해되며 하나님의 위임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아들의 나라로 세상에서 공동체의 분리. 골 1:13 이하에서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진 존재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죄의 용서는 믿는 자들을 어둠의 세력에서 구해내서 영광받으신 주님의 다스림 안으로 옮기워 놓는다. 이러한 개념은 쿰란 공동체의 사상과 유사하다.
  • 예수님의 변형. 막 9:7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다시 종말론적인 왕으로서의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정이 연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시편과 연결 구절들에 나타난 아들. 시 110편과 막 12:35 이하는 다윗의 아들의 통치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을 연관시킨다(히 1:5 이하). 히 5:5-히 5:6은 대제사장 사상을 연결시키기 위해 시 2:7과 시 110:4를 결합한다.

(c) 하나님의 아들의 종말적인 역할과 절대자 υἱός(휘오스, 자손)

  • 인자, 그리스도론의 관계. 살전 1:10은 하나님의 아들의 종말론적인 역할을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시켜 설명한다. 아마 여기서 바울은 원래의 인자 사상을 이렇게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계 2:18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계 1:13 이하의 인자와 같은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인자라는 원래의 칭호가 영광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변형된 것을 보게 된다. 막 14:62는 거꾸로 인자를 시 110:1과 연결하고 있다(시 8:6; 시 110:1을 연결하고 있는 고전 15:25 이하와 엡 1:20 이하).
  • 고전 15:28. 이 구절에서 휘오스는 묵시적인 문맥에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은 종말적인 완성을 가정하지 않은 그리스도론을 배격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유니테리언적인 개념을 피하면서 아들을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두 하나님 교리를 불식시킨다.
  • 막 13:32. 이 구절의 주제는 다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이다. 이 땅에서의 사역 기간 중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된다. 그러나 아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지만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는 알지 못한다. 이 구절에서는 "아들"이 핵심 단어가 아니며, 아마도 여기의 아들은 "인자"라는 칭호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눅 12:8; 마 13:41; 요 1:51, 인자와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 마 11:27. 이 구절은 아들과 아버지를 연합시킨다. 이 구절의 강조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간의 앎이라기보다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선택과 인정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고, 그래서 아들은 이 땅에서 아버지의 승인 아래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독특한 중보자로서의 지위가 강조되어 있다.
  • 요한 문헌. 절대자 호 휘오스의 계시적인 근거는 요 3:35; 요 5:19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요 8:35-요 8:36은 종의 일시적인 머무름과 아들의 영원한 거주를 대조하고 있다(갈 4:7, 참조: 히 23:5-히 23:6; 롬 8:15 이하).

(d)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 갈 4:4 - 갈 4:5; 롬 8:3 이하; 요 3:17; 요일 4:9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구절을 발견하게 되는데, 주어는 항상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사용된 히나 절은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이 보내어졌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혜 또는 성령을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은 선재하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런데 그 아들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에 있어서 천사들이나 선지자들과는 구별이 된다. 이러한 범주는 헬레니즘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지만, 헬레니즘 유대교에는 없는 역사적인 일회성과 종말적인 긴급성이 있다. 이러한 범주들은 공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적인 것들이다.

(e) 하나님의 아들의 동정녀 탄생과 기적의 수행.

  • 눅 1:35는 동정녀 탄생을 휘오스 데우(하나님의 아들)와 연결시키고 있다. 인간 아버지가 없는 자로서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설명하면서 그 아들을 다윗의 줄기와 연관시킨다. 이 용법에는 어떤 병행구도 없다.
  • 기적의 수행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막 5:7에서 귀신은 예수님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다. 막 1:24에 기록되어 있는 귀신 들린 사람의 외침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의 뿌리가 구약의 카리스마적인 인물(아마도 데이오스 아네르와 관련되었을 것이다)에 있음을 보여준다. 귀신들을 내어 쫓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이 사상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f) 하나님의 아들로서 의인의 고난. 마 27:43에는 대제사장들이 시 22:8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조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지혜서 2:18의 고난 받는 의인의 반열에 선 하나님의 아들과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졌기 때문이다. 고난받는 의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종이며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한 후에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는다. 여기에서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난을 당하는 것과 아들 됨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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