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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절,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christ) - 헬라어 원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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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christ)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는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자 메시아이십니다. 헬라어 원어인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의 여러 의미와 해석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christ) - 헬라어 원어 정리
마태복음 1장 1절,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christ) - 헬라어 원어 정리

 

 

마태복음 1장 1절,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christ) - 헬라어 원어 정리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헬라어 성경의 마태복음 1장 1절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ε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에 대한 정리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는 '기름 붓다'를 뜻하는 크리오(G5548)에서 파생되었으며, 아람어 메쉬하, 히브리어 마쉬아흐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어떤 직책을 위해 의식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메쉬하의 헬라어 음역은 멧시아스인데 시그마(-s)를 붙여 격 변화된 것이다. 멧시아스란 단어는 헬라어 신약성경에서 요 1:41과 요 4:25에만 두 번 나오는데 복음서 기자는 두 경우 모두 크리스토스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은 크리스토스를 그리스도로, 멧시아스를 메시야로 음역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TDN). 크리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596회 사용되었다.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의 의미 - 메시아와의 관계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는 헬라어 크리스토스(G5547)에서 파생된 라틴어 크리스투스를 거쳐 유래하였는데, 70인역본과 신약성경에서는 아람어 메쉬하에 상당하는 헬라어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마쉬아흐와 일치하며, 어떤 직책을 위해 의식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기름붓다 Anoint).

메쉬하의 헬라어 음역은 멧시아스(Messias)인데, 그것은 이에수스(G2424)처럼 시그마(-s)를 붙여 격변화가 된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란 단어는 헬라어 신약성경에서는 요 1:41과 요 4:25에만 두번 나올 뿐이다. 두 경우 모두 복음서 기자가 크리스토스로 번역하였다. 두 경우에 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 70인역본은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신약성경에서처럼(위에 언급된 구절을 제외하고) 그에 상당하는 헬라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신약성경의 기자들의 기록과 그 자료들은 기독교 이전 시대에 이미 존재했고 사용되어 있었던 단어와 개념을 분명히 전수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여러 기록들 가운데, 구약의 외경 및 위경의 증거에 의해 드러난다.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와 고전 헬라어 문헌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는 '가볍게 문지르다' rub lightly, (어떤 것 위에) '바르다' spread라는 뜻의 크리에인(chriein)에서 유래되었으며, 신약성경에서의 용법과는 별도로 어떤 것에 관해 사용되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목욕 후에 인체에 바르듯이 기름으로 바를 수도 있고(호머 시대에 이미 사용), 전쟁터에 쓸 화살을 준비할 때처럼 독을 바를 수도 있으며(호머), 물감이나 회칠(참조: 렘 22:14), 또는 화장품으로도 바를 수 있다. 원래 이 단어는 완전히 세속적인 일상의 일을 묘사하며, 성스러운 뜻은 전혀 없다. 자연히 헬라 사람에게는 형용사 크리스토스(christos)도 그것에서 파생된 것처럼 들린다. 그것은 회칠이나 화장품이나 물감으로 바르거나 칠해진,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기름부은 물건이나 사람의 특징을 묘사한다. 그것은 결코 명예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이 사람을 나타낼 때는 경멸을 나타내기조차 한다. 이것은 왜 한편으로는 비기독교인 회합에서 예수와 관련된 크리스토스(christos)가 헬라어 이름 크레스토스(Chrestos, 장모음 i를 가진 christos로 발음됨)와 혼동되었는가, 그리고 또 한편으로 왜 유대인 성서 번역가 아퀼라(Aquila)가 구약성경의 헬라어판에서 마쉬아흐 혹은 메쉬하를 크리스토스(christos)가 아니라 엘레임메노스(크리에인과는 달리 항상 기름붓다 anoint라는 뜻을 가진 알레이페인에서 나옴)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가하는 확실한 이유가 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든 어근의 의미는 크리스토스(christos)에 필수적인 조건인데, 나사렛 예수에 사용된 것처럼 너무도 빠르게 그리고 완전히 고유명사의 성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관성 가운데 히브리어 동사 마샤흐(70인역본에 나오는 크리에인의 상당어)가 근본적으로 '기름칠하다' grease라는 의미에서 지방질이나 기름과 관련된 듯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와 구약 성경

 

1.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는 메시아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두 공직자들이 특별히 마쉬아흐, 즉 기름부음 받은 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공식 예배의 책임을 진 대제사장(제사장 Priest과 왕 King)이다. 이렇게 짝지은 이유는 두 경우 모두 합법적인 행위로서 그 성격에 상당하는 기름부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 앞에서 결과적인 책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직무에 관련된 권위를 부여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오직 왕의 모습만이 특수한 메시야적 소망이라는 의미에서 메시야적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쿰란 문서에서(슥 4:11이하에 근거함), 주님께서 기름부으신 두 사람의 도래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며(뒤의 내용을 참조)(p858), 신약성경에서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모습에서 왕의 특징 뿐 아니라 분명히 제사장의 특성이 나타나있다는 사실(제사장 Priest)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하나님의 주권적 왕정 개념과의 관계

그러한 소망은 궁극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밝혀진 신앙의 기초 위에서, 왕권의 개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왕정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사무엘상 8-11장에 나오는 군주정치에 대한 다양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왕정제도가 그 의미를 조사해보면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특수한 책임을 그 당시의 왕에게 지운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구약의 신실한 사가들이 이스라엘이나 유대왕들에게 그들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에의 신앙과 일치하게 나라를 다스렸으며 살아왔는가의 여부에 따라 각자에게 내린 비판으로 보아 명백하다. 분명히 이양된 권능의 기반 위에서 하나님의 일에서 갖는 책임의 요소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것은 만일 메시야적 소망의 전개에 있어서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해야만 하는 다윗 왕조의 왕들 이후에, 그전의 사울처럼 바사왕 고레스같은 외국인이(사 45:1)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마쉬아흐로 묘사될 수 있다면, 분명히 그러하다. 고레스는 다윗 왕조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드신 백성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도구의 하나인 것이다. 메시야적 왕의 구원에 대한 기대가 옛적부터 유다 족속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창 49:8 이하) 여기에 함축된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인식은 더욱더 중요하다. 더욱 증가되는 초자연적 영역의 역사적 인물로서의 메시야 사상의 발전에 널리 영향을 미친 것은 유다의 첫번째 왕 다윗의 위대하고도 성공적인 통치 시대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었다(참조, 사 9:2-7[MT 1-6], 사 11:1 이하, 미 5:2-6[MT 1-5]). 다윗이 정복하여 그의 수도로 삼은 예루살렘(삼하 5:6 이하, 삼하 6:1이하)의 다윗 이전의 제사장 겸 왕들로부터의 기대에 대한 영향을 계산에 넣어야 하는지, 또한 얼마만큼 고려해야 하는 지는 확실하게 결정될 수 없다. 그러나 후기 유대주의의 메시야와 같이 구약성경의 메시야의 모습에는 이러한 근거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는 어떤 '제의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어떻든 간에 메시야 개념의 유력한 주제는 왕의 주제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3.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기름 부음

초대 이스라엘의 기름붓는 관습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역사적이고 술어학적인 구분을 지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하다. 최근에 조사에 의하면(특히 E. Kursch의 조사) 왕의 기름부음과 대제사장(혹은 원래 모든 제사장)의 기름부음이 형식상 비슷하기는 해도 그들의 생활 환경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의 배경은 모두 고대 동방의 관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왕들의 기름부음(특히 백성의 대표자들에 의해 행해질 때는 더욱, 그리고 정확하게. 참조, 삼하 2:4이하, 삼하 5:3)은 근본적으로 은사와 관련이 있으며, 또한 권위, 권능과 명예의 엄숙한 의식적인 이양과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히브리어 카보드, 헬라어 독사, 영광 Glory). 기름부음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권능의 지위와 그것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것은 또한 그에게 명예와 때로는 부와 더불어 그에 따르는 존경을 가져다 주었다. 반면에 제사장의 기름부음은 무엇보다도 제사장들이 능력있는 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의적인 정결 의식이었다는 주장이 상당히 지지받는다.

 

4.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바사 왕 고레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인 바사왕 고레스-비록 그가 분명히 (이스라엘) 유대 관습에 따라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지는 않았으나-의 묘사를 더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여기서는 기름부음에 의해 지정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것에 모든 중요성을 전가시킴으로써, 외적인 행동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그 개념의 승화가 들어있다. 이런 경우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특수한 방법으로 선택되어 그의 명령 아래 놓여진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의 계획에 합치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왜 구약성경의 메시야와 더불어 유대 왕들이 (다른 고대 제사 왕조의 양식에 반하여) 시편 2편 및 110편과 같은 소위 즉위 시편에서조차 신의 특징을 얻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책임이 있는 만큼 하나님께 의존하여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참조, 사울에 관한 것, 삼상 12:3, 삼상 12:5, 삼상 25:6, 삼상 6:11. 참조, 삼상 9:1이하, 삼상 15:10이하, 다윗에 관한 것. 삼하 19:22, 삼하 23:1, 참조, 삼상 16:1이하, 삼하 11-12장, 시드기야. 애 4:20, 고레스. 앞의 내용 참조).(p859). 한편 왕, 즉 다윗 왕가 출신으로 실제로 통치하는 유다 군주는 시편에서 더 이상 특별한 설명이 없이도 언제라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소개될 수 있다는 것이 이에 따른다(시 18:50, 시 20:6, 시 28:8, 시 84:9, 시 89:38, 시 89:51, 시 132:10, 시 132:17. 참조, 삼상 2:10, 합 3:13). 그러나 다윗(참조, 삼하 3:18, 삼하 7:5)과 그의 후계자들(솔로몬, 왕상 3:7이하, 왕상 8:28이하, 그 후의 왕들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음, 시 89:39, 참조, 시 86:2, 시 86:4, 시 86:16; 시 143:2), 그리고 포로시대 이후의 총독 스룹바벨 조차도(학 2:23, 참조, 슥 3:8)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웠다는 사실도 이러한 문맥에 속한다.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아들(시 2:7, 시 89:26이하)과 종은 그들이 기름부음 받은 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한에 있어서는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견해에서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함께 속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에서는 왕의 특성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종의 노래(사 43:1이하, 사 49:1이하, 사 50:4이하, 사 52:13이하)가 왕을 메시야로서 언급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학자들은 미래의 구세주 왕에 대한 기대와 본질적인 연관을 짓는 것을 점점 삼가하고 있다. 그들은 본래의 의도에 관한 한, 그것들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한다(참조,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 art. Pais theou). 반면, 만일 엘리사 같은 선지자까지도(왕상 19:16, 참조: 사 61:6) 기름부음받은 자의 서열에 들 수 있으며, 이런 생각이 그리스도 시대까지 지속된다면(IQM 11:7, CD 2:12f),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서 요구하신 것에 대한 책임의 개념 안에 그 근거가 있다.

 

5.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메시아에 대한 소망

구약성경이 메시야적 소망에 대한 어떤 분명한 발전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르게 지적되어 왔다. 단지 입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이미 언급한 구절들에서나 렘 23:5이하와 겔 34:23이하 그리고 겔 37:24이하(참조, 겔 17:22이하)를 거쳐 학개와 스가랴에 이른 구절들에서처럼 그러한 소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까지는 그들은 이상한 일치성을 보이고 있다("다윗의 가계"는 일종의 황금시대를 나타내지만, 후일에는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수립하는 형태로서 나타내고 있다). 헬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것은 그 개념의 뚜렷한 구체화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차피 민족적인 경계를 초월하게 될 종말론적인 유대국가의 이상적인 통치자에 대한 기대의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카베오와 하스모네 가(家)의 모습에서 특색을 취해, 다윗의 기억에 편향한 옛 소망에 끼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솔로몬 시 17:21이하와 시 18:5이하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메시야의 특수한 개념은 역시 고정된 형태로 나타난다. 의미심장하게도 그것과 다윗 전통과의 관계는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에서만 나타나리라고 생각될 수 있다는 결과를 지니고 있지 않다. 다윗의 후예가 아닌 대표적인 사람의 본보기는 시므온 벤 코세바(Simeon ben Kosebah)인데, 그는 뛰어난 랍비 아키바(Akiba)에 의해 바르코크바(Bar Kokhba), 즉 민 24:17에서 약속된 "야곱에서 나온 별"이라고 불리었으며, 따라서 메시야로 동일시된 바로 그 사람이다(A.b 132년경, T,J,Taanith 4:8, 68d, 48ff, Euseb., H. E. 4, 6, 2; Bar Kokhba에 관해서는 S. Abramsky의 Encyclopaedia Judaica TV 227-39참조). 메시야주의를 극심하게 동요시킨 그의 몰락은 유대교 기도서에서 다윗 혈통에서 나온 메시야의 소망이, 비록 그러한 기대가 철저한 변모를 겪게 되었을지라도 오늘날까지 주장되어 왔다는 사실에 공헌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후자는 이 연구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6.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다윗 왕과와 관련

그러나 다윗 혈통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포로시대와 주후 135년 사이에 메시야주의의 단지 한가지 유형만을 대표할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모세(참조, 신 18:15이하)와 엘리야(집회서 48:10, 참조, K.H.Rengstorf, Das Evangeliumnach Lukas, NTD3, 1972, 눅 9:51이하에 관한 것)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묵시록과 묵시 전통에서는(Eth, Enoch, 2Esd) 때때로 선재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사람으로서의 인자의 개념(참조, 단 7:13이하,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 art. Hyios tou anthroupou)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p860). 거기에는 메시야적 대제사장의 기대까지도 들어있다. 이러한 밝은 소망은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문헌들에도 매우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것들은 예수와 초대 교회가 직면했던 메시야적 소망이 결코 통합된 것이거나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메시야주의로 표현된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와 신약 성경

 

1.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나사렛 예수

신약성경에 나오는 크리스토스(christos) 개념은 이러하다. 당대의 메시야적 기대를 배경으로 한 신약성경의 결정적인 특징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신약성경의 연합된 증거가 세부적인 면에서 얼마나 다양하던 간에 의식적으로 기독론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에 관한 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서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메시야주의는 더 이상 소망의 표적 아래가 아니라 성취의 표적 아래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어디서나 그리스도 사건은 완료 시제나 과거 시제로 말해진다. 그 기록들은 자주 매우 의도적으로 또한 미래를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러나 기다리던 그 사람은 이미 오신 분으로서 오는 것이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듯이, 그도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2.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메시아적 소망

그리스도 선언과 메시야란 칭호의 본질적인 결합이 신약성경에 비교적 늦게 나오는 요한의 증언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주관적일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요 1:41과 요 4:25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 두 구절에서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분명히 동등시되고 있다(참조, 앞의 구약성경 2). 이 두 구절은 메시야 안에서 유대인의 메시야적 소망에 관한 주된 개념이, 발전해가는 헬라 교회의 소유로 되었다는 사실을 팔레스틴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와 설교 가운데로 침투되어 거기 자리잡게 되었다. 분명히 이러한 신앙의 전승은 신앙고백적이며 교리문답식으로 요약된 예수에 관한 메시지의 전달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들은 원래 원시 교회의 영역에서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말해졌다. 그다음 그것들은 팔레스틴 유대인의 경계를 벗어나 헬라 교회로 전도가 확장됨에 따라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그 과정은 고전 15:1이하에 가장 잘 그려져있다. 여기에는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했으며 그 자신이 그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복음의 본문이 나와 있다. 그곳에서는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관사가 붙지 않은 크리스토스(G5547)를 찾아볼 수 있다. 많은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정관사가 붙지 않은 메시야의 언급은 당대의 팔레스틴 유대인들의 용법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고전 15:12이하, 고전 15:16이하, 고전 15:20, 고전 15:23, 참조, 갈 2:20 이하, 갈 3:16, 갈 5:1, 고전 5:7, 롬 5:6, 롬 5:8, 롬 6:4, 롬 6:9, 롬 8:10, 롬 8:34, 벧전 2:21, 벧전 3:18, 참조, K. H. Regngsforf, Die Auferstehung Jeou, 1967, 129ff.). 70인역본의 영향은 배제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거기 등장하는 대부분이 크리스토스 퀴리오우, 주님, 즉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예수에 대한 기독교인의 믿음은 그것이 그리스도에의 신앙으로 표현되는한, 가장 초기의 팔레스틴 기독교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따라서 헬라 교회에서는 크리스토스가 예수와 관련될 때에는 상대적으로 빨리 원래의 어형인 형용사에서 고유명사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단어는 예수의 신분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역할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단어가 나타나는 곳마다 이름의 일부로서조차도 그것은 예수의 위엄을 나타낸다.

 

3.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초대 교회의 전승

고전15:3-5에서 바울이 말한 초기의 케리그마의 단편에서 크리스토스(G5547)의 용례는(관사없이) 독특한 사실의 일면을 보여준다. 분명히 신약 전체의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것중의 하나인 여기 나타난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위의 가혹한 죽음과(참조,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그에게 주어진 그리스도라는 이름 사이에 어떤 모순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이비 메시야의 붕괴가 그의 주장의 거짓됨과, 추종자들에 의해 그에게 집중된 소망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기 때문에, 초대 기독교인들의 동시대인들에게는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다(참조, 행 5:36이하, 막 15:29=마 27:17과 "별의 아들"인 시므온 벤 코세바[Simeon ben Kosebah]가 후에 "거짓의 아들"로 판단된 것).(p861). 앞에 인용된 구절에서와 똑같은 상황을, 사도 바울에 의해 그 자신의 선언에 합해진 바울 이전에 씌어진 다른 구절들, 예를 들어 롬 4:25이나(여기서 파레도네[Paredothe]가 유다의 배반이 아니고 분명 예수의 죽음을 나타냄) 롬 3:25(속죄제로서 예수의 피를 언급하고 있음)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서 기자 네 사람 모두가 십자 위에 쓴 말(참조, 마 27:37, 막 15:26, 눅 23:36)을 케리그마의 일부로서(요 18:36이하, 요 19:19이하에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 있음) 받아들인 것은 같은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유대의 사이비 왕, 즉 사이비 메시야라고 폭로하려는 의도였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의 적들에 의해 예수가 메시야임을 본의 아니게 선포된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예수가 그 사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가 메시야/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죽어야 했다는 개념과 더불어 케리그마에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해서는 이런 방법으로 일을 결정하셨다. 이것은 눅 24:26의 본원적인 관용어, 공관복음서의 고난에 관한 예언(고난당하다 Suffer), 요 3:14, 요 12:34 등의 예수에 관한 요한의 말들,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작별의 강화(요 14:16, 뒤의 내용 참조)에 의해 증거되었다. 이런 모든 구절에서 받게되는 뚜렷한 인상은 원시 교회가 예수의 공동체를 대표하고 있을 때, 그것은 그 자체를 단순히 메시야적 공동체를 대표하려고 의도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해 설교할 때, 그것은 동시에 그 생명과 역사적 기원과 그 목적과 관련시켜 그 자체를 메시야적으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그 자신을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고전 10:18)과는 달리 하나님의 이스라엘 Israel(갈 16:16), 즉 참된 이스라엘로서 여기기 시작했다면, 이것의 이성적 영적 근거는 그때 막 윤곽이 잡혔던 메시야주의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손 닿는 곳에 있었고 예수와 연관지어졌던 메시야주의는 영성화되지도 않았고 재해석되지도 않았다. 그보다도, 그것은 받아들여져서 더 큰 규모로 시작되었다. 바울은 고전 15:25에서 마지막 사건을, 그리스도/ 메시야의 왕적인 통치 형태로의 종말 앞에 자리하게 한데서 헬라 교회에게 같은 내용을 증거하고 있다. 자연히 어떤 경우라도 유대인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닌 공관복음서의 귀절들도 예수를 왕으로 비유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 예로서는 임금의 혼인잔치의 비유(마 22:1이하), 세상의 심판에 관한 비유(마 25:31이하, 인자는 왕이다, 마 25:34, 마 25:40)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예수 제자들의 자기 희생에 관한 예수의 왕되심의 특별한 성격을 설명하는 눅22:25이하와 같은 구절등을 들 수 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네 복음서 중 가장 뒤에 나오는 요한복음서에서 예수의 메시야되심이 나오는 부분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수와 나다니엘의 대화로부터 시작하여(요 1:47이하, 그러나 그 앞의 요 1:19이하, 요 1:41, 요 1:45를 참조하라) 요 6:1이하와 요 12:12이하를 거쳐(두 귀절만을 언급하자면), 빌라도와 예수간의 대화(요 18:33이하)와, 빌라도와 대제사장들간의 대화(요 19:21이하)까지에 걸쳐서 나타나는 예수의 왕되심에 관한 올바른 이해에 대한 것이다. 만일 엄숙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에서 요한 자신의 교회의 고백신경을 깨달을 수 있다면(요 17:3, 참조: 요 1:17, 요 20:31, 요일 2:22, 요일 4:2, 요일 5:1, 요이 1:7) 누구든 그것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이 말에서 두번째 단어는 그 예언적 성격을 하나도 잃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은 정말 소문자로 시작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원시 기독론적인 유업은 그 모든 탁월함속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보존되어 왔다. 요한은 분명히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 모습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 모든 전통적인 설명 자료를 빼놓고 있다(유대지파의 사자, 계 5:5, 다윗의 싹, 계 22:16 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역시 세기가 바뀔 때 기독론의 완전한 지속이 원시 팔레스틴 교회와 더불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의 보편적 신앙의 개념 형성에 대한 절박한 시도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4.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성도들의 신앙 고백

자연히 신약성경의 그리스도 신앙 그리고 신약성경의 그리스도 고백에서 메시야적인 요소는 신약성경의 증인들 사이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의 예수 부활 Resurrection로 불리우는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그리스도/메시야로 부활한 것으로 간주된다(참조, 행 2:31, 고전 15:4, 롬 1:4).(p862).

그것은 어디서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나와 있으며(참조, 행 2:36), 더우기 하나님 자신에 의해 옹호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참조, 롬 6:7이하, 딤전 3:16). 따라서 예수의 고난에 대한 그의 말씀에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말씀이 항상 그의 부활을 알리는 말씀과 함께 등장했다는 것은 충분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믿기를 거부하거나 그를 십자가의 죽음에 넘긴 적들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되심-이것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의해 반증되듯이 보이나-을 보장하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부활사건은 아무리 역사적으로 해석된다 하더라도 예수의 메시야되심에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비유대적 환경에서 복음서의 구절이 이것에 대하여 어떤 차이점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전의 유대인과 이전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기독교회가 그 자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 교회와 역사의 관계에 많은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특한 사건 안에서 교회 자신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자각은 형식상으로 여기서 고백으로 결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변할 수 없는 역사적 형태 안에서 소위 역사의 예수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구약 역사와 계시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된 영적인 유산의 영원한 확인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모든 비역사적 신앙심과 설교를 결정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로마서 9-11장에서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회의 관계에 대해 바울이 쓰고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로운 천국과 새로운 땅에 대한 소망과 꼭같이(참조, 특히 롬 5:1 이하, 롬 22:16) 하나님께서 합법화하신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확신을 가지고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사시어 하늘에 오르신 예수(참조, 계 1:5, 계 1:18), 또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와 관련이 있다는 확실성(행 28:31, 눅 17:20이하)과 관계가 있다. 이런 범위 안에서, 신약성경에서 원칙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세부에 있어서는 다양한 형태로 시행된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예수의 메시야되심 안에 그 근원과 중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5.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그리스도, christ) - 명칭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혹시 예수의 이름이 지니는 메시야적 위엄과 명예의 칭호와의 관련성이 그의 종말론적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그의 교회가 지어낸 것이 아닌가, 혹은 어떤 식으로든 예수 자신이 그에 책임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야적 자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필요한 만큼 광범위하게 다룰 수가 없기 때문에, 다음 몇가지 생각을 통해, 요구되는 필요불가결한 최소한의 결론에 마찬가지로 이르게 될 것이다.

(a) 역사비평이 신약성경의 복음서들과,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다루어진 전통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수 자신이 메시야의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확인하기에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항상 주장되어 왔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오늘날 학자들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한 고백과 함께 공회 앞에서의 예수의 심문에 대한 기사의 케리그마적 성격을 지적해낼 뿐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주된 두가지 자료 중의 하나인 소위 Q말씀 자료가 예수에게 메시야되심을 부여하는 아무런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다음 두 이유에 관해서는 주의를 해야만 한다. 한편으로 오늘날까지도 Q자료는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그의 생애중 그를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케리그마 그 자체가 예수로 하여금 공회 앞에서 그 자신을 메시야로 나타내도록 하는 생각에 이르도록 하였겠는가 하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전승의 증거에 비추어, 예수 자신이 특수한 메시야로서의 계획은 계발하지도 않았고, 그 자신을 어떤 형태로든 메시야로 칭하지 않았다는(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능성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설화 전승에 의하면,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다윗의 아들"(막 10:47이하 등, 아들 Son)과 같은 메시야적인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단순히 허용했을 뿐이다. 더우기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전승에 반영된 예수의 모습은 그가 어떤 전통적인 메시야적 묘사에 대해 어느 것도 긍정하지 않았다고 추정하게 만든다.(p863). 그러므로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정치적인 구세주 왕이라는 당대의 메시야적 소망을 그에게 부여한 것을 그의 인격으로써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당대의 메시야적 소망에 대해 정확성을 기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위 베드로의 가이샤라 빌립보의 고백(마 16:13-23, 막 8:27-33, 눅 9:18-22) 같은 사건조차도 그 역사적 당위성을 받아들인다 해도 근본적으로 이러한 결론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만일 예수가 언제라도 그의 메시야되심에관해서 그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주었다면, 그의 수난과 부활에 관련된 사건들이 전승에서 아주 다르게 나타나야 했으리라는 사실로 집약된다. 끝으로, 그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전통은 예수가 사망이나 무덤을 이기도록 허락하지 않지만, 그의 부활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편에서 그를 신비한 직접적인 행동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이미 그려진 모습에 덧붙여야 한다. 더우기 전통은 이 신비를 벗기는 위치에 있지 않으며, 그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료에 대한 지나친 회의에 빠짐이 없이, 그 결과는 아주 일치된 모습이다. 그것은 매우 불완전하게 그리고 불균형의 양식으로 메시야적 비밀이라는 모호한 문구로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구는 처음에 제기된 문제의 대답이 발견될 수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b) 예수의 모든 전도활동이 그의 가까운 주변과, 그 안에서 특히 그의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비로소 그 문제는 올바르게 즉 전통에 있는대로 그리고 예수 자신에 의해 있는 그대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그들과 분리시켜서는 예수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특히 그들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어떤 형태로든 그의 자의식에 관해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아마도 매우 중요한 일화는 아닐지 모르나, 어쨋든 한 일화인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눅 24:19)에서의 예수의 제자들의 역할을 고려하면 더욱 필요해진다. 앞서 인용한 구절 자체가 암시하듯이, 예수의 자의식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주는 유력한 자격과 함께 제기되긴 했지만 최근 다시 일어난 선지자의 범주는(참조, E. Kasemann, "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 Ecsays on New Testament Themes, 1964, 15-47) 만일 그의 죽음과 더불어 예수의 역사가 끝났다면 예수의 역사에서 그 일화적 성격을 빼앗기에 결코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이 이러한 범주를 사용했다거나 혹은 그 자신과 관련된 그의 영감의 사상을 사용했거나, 또는 그가 그것을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했다는 어떤 암시도 전승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는 없다.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이 말한 것은 전승에 나오는 다른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이해하려는 기자 자신의 시도이다(참조, 막 6:14이하=마 14:1이하, 눅 9:7이하). 이 부분에서 그것에 관한 한, 전승은 예수에 대해 유일하고 적절한 태도가 신약에서 피스티스(pistis)라고 불리며 단순한 믿음을 포함하는 신앙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가 그의 제자를 다루는데 진실로 놀라운 것은, 그가 처음부터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그에 관한 모든 학설과 모순되며, 근본적으로 그것을 배제하는 이런 태도로 그들을 불러들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태도가 필연적으로 특별한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자들 자신은 부활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와 메시야 범주의 사용과의 연관성에 책임이 있는 것은 예수 인간 자체와 제자들이 그에게서 받은 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들이 예수의 생애 동안 역사의 예수로부터 받은 인상만을 다루게 된다(참조, 눅 24:32). 이것은 부활에 의해 야기된 상황이 예수에 대한 메시야적 이론의 기초를 쌓는데 적절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고려되어져야 한다. 새로운 상황은 사상의 전개를 북돋아준 것이 아니라, 마지막 개인적인 결단과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지원했다. 이것은 단지 만일 다시 사신 예수의 모습과 지상의 예수의 모습이 그들과 그의 관계라는 입장에서 상반되지 않고 서로 이해해주는 것이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c) 따라서 그 결과는 메시야되심의 범주에 관한 예수의 자의식이나 자기 이해에 대한 남은 문제들이 잘못 제기되었다는 것을 전통 자체로부터 보여주어야만 한다. 단 하나의 질문은 인간 예수의 특성에 관한 것이 될 것인데, 그것은 부활 후에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성서와 전통에 표현된 대로 그들 백성의 메시야적 소망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이 했던대로 예수 안에서 신앙을 갖는데 다른 길을 택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p864). 이 문제는 구세주 왕의 직무와의 관계에 의한 메시야의 설교로서 더욱 중요하며, 그 문제를 기독론의 구현점이 되도록 만드는 특별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기서 다룰 수 없는 범위의 문제들에 접하고 있다. 제자들로 하여금 지상의 예수 안에서 메시야의 문제와 직면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 책임은 예수의 인간 자체의 신비였다는 것은 충분히 말했다. 다시 사신 예수와의 만남의 기반 위에서, 제자들은 그가 메시야였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David의 집과 이스라엘 Israel에게 오직 신앙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으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신 언약을 이행하셨다는 고백에 의해서 마침내 그 문제에 대답했다.

(d)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독교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의 메시야적 지위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열조에게 하신 약속을 예수 안에서 이행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세상에 주신 구원의 모든 면모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범위 안에서 예수 안에 묶여 있다. 그리스도였던 예수 안에서, 예수를 신뢰했고 또한 그의 죽음과 부활의 결실을 그들의 것으로 삼았던(롬 4:24이하)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 충만 Fullness). 이것을 메시야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칭호로 표현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케리그마가 그리스도 안에 매어 있는 구원을 설명할 때는 특별한 관계에 적절한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이라든가 주님, 또는 우리 주, 구세주(구속 Redemption, art. sozo), 혹은 중보자(언약 Covenant, art. mesites) 등의 특별한 호칭이 의존하고 있는 그의 인격이나 역사(役事)의 일면을 차례로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리스도가 존칭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일부로 변형되었다면, 이것은 동시에 구원의 중보자로서의 그의 전 역사의 조건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그의 역사적인 모습의 필수적인 특징과 일치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하나님 계시의 과정에 표명된 대로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의 순종이다. 이런 범위 내에서 예수 자신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긍정은, 그것이 명백하게 표명되었건 아니건 간에 전체 케리그마에 대해서는 십자가로 향한 그의 길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부활과, 하나님 곁으로 올라가심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기독론의 중심이 되는 이러한 예수의 메시야되심의 요소는 신약성경에서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소개한 기독론적인 찬송에 가장 명백하게 그리고 동시에 가장 포괄적으로 나타나 있다(빌 2:5이하, 빈 Empty, art. kons). 여기서 그는 육신을 입으심으로부터의 순종의 삶과, 십자가에서의 순종의 죽음을 거쳐 부활과 하나님 곁으로 오르심까지 예수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서, 즉 나사렛 예수와 동일인인 메시야의 길로서 묘사하고 있다. - K. H. Rengstorf.] (p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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