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2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각각의 자녀를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낳고"를 뜻하는 헬라어 원어는 "γεννάω"(겐나오)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의 아버지가 되다'입니다. 헬라어 원어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에 대한 여러 의미들과 해석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and Isaac the father of Jacob, and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Ἀβραὰμ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σαάκ, Ἰσαὰκ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ακώβ, Ἰακὼβ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ούδαν καὶ τοὺς ἀδελφοὺς αὐτοῦ,
동사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는 겐나에서 유래했다. (a)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는 '낳다, ~의 아버지가 되다'를 뜻하며, 아버지에 의한 출생과 어머니에 의한 출산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직계 후손, 또는 법적 후손에 대해 사용하기도 한다. (b) 신약성경 시대의 세속 세계에서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는 비유적 의미로 '생기게 하다, 태어나게 하다, 존재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동사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는 70인 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얄라드(낳다)의 역어로 간혹 하라(잉태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문자적인 용법 외에도 욥 38:28에는 비유적인 용법이 나온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호칭에서 신뢰나 애정의 표시로 사용되거나(삼상 3:16; 삼상 24:12; 왕하 3:12), 하나님께서 메시아 왕을 낳으심에 대해 사용되었다(시 2:7; 시 110:3).
동사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는 신약성경에서 97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45회, 요한의 기록에 28회 사용되었다. 겐나오의 실제적인 의미는 고전 헬라어의 용법과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모두 사용되고 있으므로 문맥에 의하여 능동태와 수동태로 결정된다(참조: 마 1:3, 마 1:5 이하; 마 2:1, 마 2:4; 마 19:12; 눅 1:13; 요 9:34; 요 16:21; 갈 4:23). 그러나 이 동사는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 또는 확대된 의미로도 사용된다.
(a)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는 여러 구절들에서 어떤 사람을 낳았다고 언급되는 하나님 자신에게 사용되었다.
① 행 13:33과 히 1:5; 히 5:5는 시 2:7을 인용한다. 히브리서의 구절들은 의미심장하게 이 술어를 시 110편과 삼하 7;14와 관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아들이며, 하나님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성취하셨다. 왜냐하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분으로서, 그는 참되게 기름 부으심을 받은 분으로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직분을 취하셨다. 두드러진 것은 신약성경이 시 2:7을 예수님의 탄생 기사들에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 2편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되는 어는 곳에서나 육체적이며 성적인 출생은 완전히 배제된다. 또, 행 13:33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에 적용한다. 반면에 눅 3:22의 서방 본문(고대 라틴역본들, 저스틴과 오리겐)의 다양한 독법은 시 2:7의 말씀을 세례(침례)에서의 예수님께 적용한다.
히 1:5과 히 5:5에서 "오늘날"에 대하여 그 의미를 정확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스트라드만(H. Strathmann)은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침례)를 언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단순히 본문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시 2:7의 하반절이 히브리서에 인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J. Jeremias and H. Strathmann). 케제만(E. Kasemann)은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를 승천 후에 하늘의 선언을 통한 아들 신분의 확증과 동일시한다(Dss Wandernde Gattesvolk, 58). 그러나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에 의한 출생이 양자 됨이라는 구약성경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 구절들은 성자께서 이미 어떤 분이라는 것에 대한 선언과 선포에 관계한다. 예수님의 아들 신분은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호 에스카토스 아담, 고전 15:45). "이와 같은 출생이 양자 됨이라는 의미에서 혹은 동정녀 탄생의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상은 그리스도를 믿는 초기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이해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는데 특히 예수님의 부활과 그 결과로써의 새로운 아이온의 기본 의의에 대해, 요컨대 초기 기독교 사상의 종말론적 충동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F. Buchsel).
② 요한이 기술한 성경들은 겐네데나이 에크(~에서 탄생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신자들의 기원을 묘사하고 있다. 이 어구는(에크시-) 에르케스다이 에크(~에서 나오다; 참조: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요 8:42)와 에이나이 에크(~에서 오다, ~의 출신이다 be from; 참조: 행 5:39 사건들에 대해; 요일 3:10, 사람들에 대해)와 비교된다.
신자의 자신의 참된 존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고 있다. 곧 자신의 시작과 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겐네데나이)에 대한 언급은 사람이 새로운 혈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의 옛 본성을 버리고 새로운 본성을 취하여 거듭나야 한다(요 3:3, 요 3:5-8; 참조: R. Bultmann, The Gospel of John). "거듭 남"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로서"(에크 투 데우, 요일 3:3; 참조: 요일 2:29; 요일 4:7) 거듭남과 또한 "위로부터"(요 3;7; 참조: 요 8:23) 거듭남과 같은 동일한 본질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 사상을 하나님의 행위로 묘사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이하). 사람의 생각에는 이러한 거듭남이 필연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인다(요 3:4). 왜냐하면 이 개념이 인간의 역량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것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린다(요 3:5-8).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자만이 자신의 혈통을 이해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요 3:5; 참조; 마 19:28).
수많은 학자들이 아노덴 겐네데나이(위로부터 나다)라는 표현이 영지주의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아노데(위로부터)은 거듭남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요 3:3, 요 3:7) 위로부터 빌라도에게 주어진 권세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요 19:11). 예수님께서는 위에서(아노) 난 자신을 아래서(카토) 난 자신의 대적자들과 비교하신다(요 8:23).
그러나 아노덴은 또한 "다시"라는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 탄생은 또한 물(엑스 휘다 토스)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언급한다(요 3:5). 그러나 요 1장과 요한일서에서 물 또는 세례(침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요한과 바울은 모두 세례(침례)를 2차적인 것이며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요 4:2; 고전 1:14-17).
요 3:5에서 물이 창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창 1:2) 하는 문제와 씻음이 탄생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인간의 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는 문제는 충분한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중생이 세례(침례)의 동의어가 된 것은 저스틴(Justin)과 이레네우스(Irenaeus)와만 관련된 것이다.
(b) 바울은 γεννάω(겐나오, 낳고, the father of)를 고전 4:15와 몬 1:10에서 자신의 개심과의 관계에 대해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 속에 형성되기까지의 수고함(오니노) 또는 해산의 고통을 겪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갈 4:19). 동일한 사상들이 믿음 안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의 배경으로 존재한다(고전 4:17; 딤전 1:2; 딤후 2:1; 참조: 벧전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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